사라지는
하나이와오이

 

 

  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소파에 앉아 양 발끝을 동동 구르던 하나마키는 벌떡 일어났다. 하루가 막 지나가려는 차였다. 차가운 문고리를 잡자마자 그는 제 손이 얼마나 젖어있는지 깨달았다. 그러나 평소처럼 바지나 티셔츠 밑단에 문질러 닦을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바로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문을 열자 아주 습한 공기가 그의 목덜미를 스쳐지나갔다. 이와이즈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어있었다. 그의 뒤로 젖은 발자국이 그림자처럼 늘어서 있었다. 하얗게 젖어있는 뺨과 마른 뺨을 가느다란 빗줄기가 찔러댔다. 하나마키는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 손목을 감싸 잡아당겼다. 뜨듯한 손바닥에 닿는 손목은 너무나도 차가웠다. 꽉 힘을 주지 않았더라면, 손목의 주인을 잠도 자지 못하고 기다렸다는 것은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손에 닿지 않게 쳐냈을지도 몰랐다. 하나마키는 턱에 힘을 주며 다시 한 번 더 힘을 주어 당겼다. 발 한 쪽이 복도에서 떨어지며 질퍽하게 젖은 소리를 냈다. 문은 다시 닫혀 빗줄기를 가로막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난 뒤로 기침소리가 이어졌다. 하나마키는 화장실에서 마른 수건을 손에 잡히는 대로 가져와 모조리 펼치고 머리 위를 덮고 어깨를 감싸고 허리를 둘러매고 발밑에 깔았다. 양손을 쉼없이 움직여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짜내고 닦아낸 다음에는 방으로 들어가 담요와 잠옷을 가져왔다. 옅은 섬유 유연제 냄새와 햇볕 향기가 나는 잠옷을 건네받는 손끝은 파랗고 젖어있었다. 하나마키는 한숨도 내쉬지 못하고 수건으로 그의 머리칼을 털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빨리 갈아입어. 감기 걸리겠어."

"…걱정시켜서 미안해. 자꾸, 너한테,"

"내일 얘기해. 이와이즈미. 응? 난 괜찮아. 잠이 안 왔어, 그냥."

  텔레비전도 안 켜놨으면서. 가라앉은 목소리의 중얼거림을 하나마키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피했다. 그리고 티셔츠 밑단을 움켜쥐었다. 빨리 갈아입어. 입술이 파래.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의 손을 피해 밑단을 잡으며 등을 구부렸다. 하나마키는 손을 뗐다. 티셔츠를 벗은 몸은 바다에 갔다온 이후로 햇빝에 그을려 근사해진 그대로였지만 그의 눈에는 하얗게 질려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나마키는 무겁게 느껴지는 티셔츠를 그의 손에서 뺏고는 바닥에 떨어진 수건을 쥐어주었다. 바지도 갈아입으라고 말하려던 하나마키는 아, 하고 탄성을 내뱉으며 이마를 문질렀다가 방으로 들어가 눈을 감고 고른 속옷을 잠옷 바지 위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당장 따뜻한 마실 걸 타주겠다며 부엌으로 도망치듯이 걸어갔다. 하나마키는 부엌에 가는 길에 티셔츠를 세탁기에 던져넣었다. 철퍽, 하고 금속 벽에 조금 달라붙었다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손을 털었다. 축축한 티셔츠에서 흘러나왔던 빗물이 손목까지 흠뻑 적시고 있었다.

  하나마키는 부엌에서 따뜻한 유자차를 타왔다. 이와이즈미는 그가 머그컵 고리를 움켜쥐고 있는 동안에 조심스럽게 머그컵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머그컵은 그다지 뜨겁지 않았고 덕분에 그는 양손으로 머그컵을 감싸 들었다. 파랗게 질려있던 손끝에 겨우 열이 돌았다. 하나마키는 함께 탔던 제 몫의 유자차를 마시며 고개를 숙이고는 후후 바람을 불어 식히다 조심스럽게 마시는 입술의 뾰족한 모양새를 옆에서 지켜봤다. 밝은 얼굴로 외출 준비를 하던 옆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움과 기대가 켜켜이 쌓여있는 얼굴은 그 자체로 사랑스러웠다. 겨우 푸른기가 가신 입술을 보고 있자니 한결 착잡해졌다. 그거 마시고, 감기약 먹고 자자. 하나마키는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내려 머그컵 안을 바라봤다.

 


  불행한 예감은 빗겨가는 법이 없었다. 아무리 건강 체질인 이와이즈미라고 해도 어제의 비는 혹독했다. 열이 올라 벌게진 얼굴을 바라보며 하나마키는 쿨링시트를 이마에 붙여주었다. 언제 또 마스크는 했는지 기침소리는 죄다 마스크에 먹혀들어가 텁텁한 소리만을 냈다. 춥다고 덜덜 떨며 이불로 몸을 꽁꽁 싸매는 것이 안타까워 그는 제 체온으로 그를 따뜻하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에게 허락된 것은 오직 간호 뿐이었다. 손을 잡는 것을 비롯해서 모든 사적인 접촉은 금지당했다. 이전에 감기에 걸린 그와 키스하고서 감기에 걸렸던 하나마키를 기억하고 있는 탓이었다. 땀에 젖어있는 옷을 벗기고 차가운 물에 적신 수건으로 몸을 닦아내며 그는 원망의 말을 속으로만 쏟아냈다. 그러다 톡 입가를 건드리는 손끝에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바라봤다. 웃고 있는 것인지 눈가가 조금 접혀있었다.

"아프면서 왜 웃는 거야, 이와이즈미."

  약간 퉁명스러운 대꾸가 툭 입 밖으로 튀어나갔다. 하나마키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난처해하는 사이 마스크 안쪽으로 웃음소리가 섞인 기침소리가 부딪쳤다.

"모른 척도 못하게, 튀어나와 있잖아. 언제부터 이랬더라."

  과거를 가늠하려는 듯이 가늘어지는 눈매를 보며 하나마키는 마른 옷을 그에게 입혀주었다. 생각은 그만 하고 이만 자라는 것처럼 그는 머리맡에 놓인 스탠드의 조명을 한 단계 낮췄고, 다시 이불을 덮어주었다. 방에서 나가기 전에 혹시나 찬 바람이 들까 싶어 발끝을 잡아든 그는 이불 끄트머리를 모조리 발목 뒤로, 종아리 뒤에까지 오도록 접어 감싸고 내려놓았다. 완전히 이불 고치에 파묻힌 모습을 보며 하나마키는 미소를 지었다.

 


  방문을 소리없이 닫은 하나마키는 그의 방으로 들어갈까 하다가 베란다로 나왔다. 들이친 비에 바닥이 흠뻑 젖어있었다. 별 다른 생각없이 신은 슬리퍼 역시 비에 흠뻑 젖어 다 마르지 않은 채였다. 하나마키는 발가락 사이로 스며드는 빗물에 으, 하는 신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베란다에 기대어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오이카와 토오루. 하나마키는 원망스러운 이름을 한참을 들여다보다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자마자 미안하고 잘못했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애교 섞인 간지러운 목소리들이 봇물터지듯 쏟아졌다. 귀에서 한참 떨어뜨린 상태에서도 이렇게 잘 들렸으니 얼마나 큰 목소리로 떠들어대고 있는 건지 훤했다. 그는 한참 글자를 째려보다가 잠잠해졌을 때 어깨와 머리 사이에 핸드폰을 끼워넣고서 찬장을 더듬어 담배와 라이터를 찾았다. 하나를 꺼내 입에 무는 것까지는 금방이었지만 하나마키는 불을 붙이지는 못했다. 대신 물고 있는 필터를 껌이라도 되는 것처럼 질겅질겅 씹어댔다.

"잘 들었어, 오이카와. 사실 다 안 들었지만."

[왜 너가 받아? 이와쨩은? 자고 있어? 늦잠이려나.]

  능청을 부리는 목소리에 하나마키는 입을 다물었다. 굳이 대꾸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지만 빗속에서 그를 한참 세워둔 장본인이었다. 다문 입술, 목구멍 아래로 하나로 뒤엉킨 질투와 분노, 약간의 체념은 창이 되어 그의 목구멍을 쑤셔대고 있었다. 당장 분노의 말을 그에게 쏟아내라고 하고 있었다. 하나마키는 필터를 거의 뜯을 기세로 씹어대다가 모인 침을 꿀꺽 삼켰다. 화장실 물을 내린 것 마냥 단숨에 평온해졌다. 자신을 자극하려면 이정도로는 부족했다. 애매하게 보답 받고 있는 사랑이 오늘부로 며칠 째던가. 헤아리기도 어려웠다. 하나마키는 너덜해진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걸쳐두며 입을 열었다.

"걘 아파. 어제 너 기다리느라고 한참 늦게 왔거든."

  수화기 너머가 그제야 조용해졌다.

  분명 비가 온다고 우산을 챙겨줬는데 그 우산은 어디다 뒀는지 몰라. 어제 바람이 세서 부러졌을지도 모르겠네. 그러고보니까 어제 빨래 돌리는 거 까먹었다. 정신 없었네. 신발도 빨아야지. 어제 신은 거 이와이즈미가 좋아하는 운동화였는데. 망가졌으면 어떡하지. …그래도 제대로 집에 와줘서 다행이다. 이제 돌아올 곳은, 우리 집이라고 생각해주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해도 되려나. 비싸다고 택시도 안 타고 왔겠지, 어제. 고집은. 아. 열은 언제쯤 떨어지려나. 기침 많이 하던데 따뜻한 물 마실 수 있게 준비해놔야지. 조금 있다가 제대로 약 챙겨먹어야 하는데 식욕은 있으려나. 뭘 먹여야 밥을 잘 먹을까. 그리고, 그리고…….

  하나마키는 말했다.

"아프지 말라고도 하지마. 넌, 그 말 할 자격 못 돼."

  하나마키는 소리 내어 말하고도 자신이 놀라 입을 다물었다. 재잘재잘 좋은 목소리로 시끄러웠던 휴대폰은 아주 조용했다. 끊어졌나. 뺨에 눌리고 있던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자 통화시간은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59에서 다시 00이 되었을 때 그는 종료버튼을 눌렀다. 전화는 아주 손쉽게, 끊어졌다.

 


  하나마키는 피우지 않은 담배를 버릇대로 재떨이에 꺾고 짖뭉개고는 기지개를 펼쳤다.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으니 후련하긴 했다. 물론 그가 완전히 가벼워지기 위해서는 이와이즈미가 필요했다. 웃고 있는 이와이즈미가. 그는 봄꽃을 보며 환하게 웃었던 어느 날의 미소를 떠올리고는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그가 약기운에 잠들어 누워있는 그 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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