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우시이와



  올해의 MVP인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는 날이었다. 이와이즈미는 잠깐 켜둔 포털사이트에 가장 메인을 차지하고 있는 이름을 보고 한숨을 내뱉었다. 큼지막한 기사 사진에는 수없이 터뜨리는 플래시를 전면으로 받아 하얗게까지 보이는 그의 얼굴이 있었고, 인터뷰는 언제나 그렇듯 길지 않았다. 이번 시즌에 그가 세운 기록들과 경기 실적에 대해서 장황하게 떠들어대는 기사를 느릿하게 읽었다. 일정이 엉키는 바람에 공항에 나가 마중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마중이라고 해봤자 소속사가 내어준 선팅이 짙게 되어있는 차에 숨죽여 있다가 그가 올라타서 문을 닫고 공항을 한참 빠져나와서야 뒷자리에서 나와 그를 안아주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는 자신과의 교제 사실이 알려져도 상관없다며 우직하게 자신과 시선을 맞춰왔지만, 상관이 있는 것은, 그리고 사실 자신이 없는 것은 이와이즈미 하지메, 그 자신이었다. 작년까지는 크지 않은 차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커지는 눈동자에 가득 차오르는 기쁨과 마주하며, 단단하게 끌어안는 팔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자신 역시 그만큼의 힘으로 그를 끌어안고 오랜만이라고 어서 오라고 말하며 반겨주었지만 올해는 그도 하지 못했다. 이와이즈미는 가볍게 혀를 차며 인터넷 창을 껐고 커피를 길게 마셨다. 그리고 핸드폰을 보니 메일함에 빨간 점이 붙어있었고 그 안에 하얀 글씨로 1이 적혀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엄지 손가락으로 메일함을 꾹 눌렀다. 길지 않은 내용이었다. 집에 가서 자신이 오기를 기다리겠다는, 그리고 많이 보고 싶고 그립다는 것이 전부였다. 직설적으로 말하는 글씨 한 자 한 자를 천천히 읽는 것만으로도 그의 목소리가 떠올라 이와이즈미는 첨부되어 있지도 않은 음성 파일을 열어 듣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몇 번이고 짧은 문자들의 나열을 읽다가 겨우 핸드폰을 끄고 인터넷 창도 닫았다. 그리고 가벼운 플라스틱 컵을 들고 그 테두리에 입술을 대고 기울였다. 몇 번째인지 채 세지 못한 커피가 금방 바닥을 보였다. 지금 당장은 일에 집중해야하는 때였다.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매 시즌마다 갱신되는 기록들을 남길수록 그에게 들어오는 제안들은 한 명에게 들어온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흘러넘쳤다. 이와이즈미의 소꿉친구이자 우시지마 못지 않게 열심히 코트를 뛰는 오이카와 토오루 역시 마찬가지겠지만─아니, 그는 연예인 같이 화려하게 피어난 얼굴과 특유의 재치있는 입담으로 보다 활발하게 외부 활동을 했으므로 우시지마보다 더 많은 제안들을 받았을 것이었다. 그래도 이제는 소꿉친구보다는 연인인 그의 일이 더 신경쓰였다. 그러나 우시지마는 언제나 그렇듯 스스로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활동만을 고집해왔다. 그런 그가 광고 촬영으로 인해 예정된 입국 날짜보다 늦게 입국한 것은 두드러지는 변화였다. 이와이즈미 역시 그런 변화에 신경을 기울이긴 했지만,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직접 대면하여 물어보거나 혹은 그가 촬영한 광고를 나중에 본 다음에야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이와이즈미는 어느새 석양으로 붉게 물든 회사 내부를 길게 훑어보다 짐을 정리했다. 그가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갈 시간이었다.


 사람이 빽빽하게 들어찬 버스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가는 길은 무거웠다. 그러나 집 앞에서 고개를 들었을 때 평소라면 캄캄한 어둠만이 있을 창문으로 화사한 빛이 보였다. 불이 켜져있는 집,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는 집, 연인이 기다리고 있을, 그와 자신의, 우리의 집. 이와이즈미는 저도 모르게 조금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문 앞에서 그는 가방 안에 있을 열쇠를 꺼내드는 대신에 초인종을 눌렀다. 검지 손가락에 꾸욱 눌렸다가 서서히 밀어올리는, 용수철 같은 것이 안에 들었을 초인종 버튼은 들리지 않을 삐그덕거리는 비명을 내지른다. 그는 한 번 더 초인종을 눌렀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문을 연 것은, 역시나 우시지마였다.


"…하지메. 어서 와라."

"보고 싶었어. …미안해, 마중 못 가고."

"괜찮아, 그런 건."


  이와이즈미는 그의 등을 꽈악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웅얼거렸다. 그리고 이마를 두어 번 부빗거리며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에 우시지마는 웃었고 그를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그에게서 묻어나는 냄새를 맡았다. 땀냄새라든지 파스 냄새, 필터 청소를 미룬 에어컨 냄새에 둘러싸인 채로 한참을 지낸 탓에 낯설어진, 그러나 그립고, 불연듯 욕망을 일으키는 그의 냄새였다. 도시의, 커피 냄새와 흐린 담배 연기가 느껴졌고, 어딘가 고소한 잉크 냄새가 났다. 긴가민가한 꽃향기까지도.그는 그를 끌어안은 채로 이제 막 코트에 들어선 것처럼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움직임을 감지해야 켜지는 등이 꺼진 채로 두 사람은 한참을 마주 안고 있었다.


  먼저 눈을 뜬 것은 이와이즈미였다. 그리고 그는 현관에 놓여있는 낯선 신발에 우뚝 멈춰섰다. 가지런히 놓여있는 것은 검은색 하이힐이었다. 밑창이 붉은 하이힐. 이와이즈미는 저도 모르게 그를 밀어냈다.


"저거 뭐야?"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왔고, 이와이즈미는 내뱉자마자 손등으로 아랫입술을 짓눌러 문질렀다. 정말로 오랜만에 만난 것인데,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하이힐이라니? 제 집 안에 저렇게 가지런히 놓여있을 이유가 없는 신발이었다. 누구의 것이냐고 물으면 그와 자신이 아닌, 제 3자의 것이었다. 제 3자. 그것도 여자. 얼굴에 열이 올랐다. 기다린다는 말에 열심히 일을 하고 왔는데, 기다리는 건 저런 하이힐이라니. 그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고 닫혀있는 문에 뒷통수가 부딪쳤다. 윽. 그는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청승맞게. 그는 눈을 꽉 감았다. 아니다, 청승맞은 게 아니라 이건, 당연한 것이다. 저런 방식으로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것을 전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었다. 거기다가 그가 시즌이 아닐 때에나 겨우 함께 사는 집에 자신보다도 먼저…


"…아, 선물로 받은 거다. 화보 찍을 때 저걸 신고 찍었거든."

"뭐?"


  제어장치 하나 없이 비극으로 치닫던 망상이 뚝 끊겼고, 이와이즈미는 열심히 숨기려고 했지만 얼빠진 목소리가 먼저 흘렀다. 여자의 신발치고는 조금 크다 싶었지만, 발이 큰 여자야 세상에 얼마든지 많았다. 근데 화보를 찍는데 왜 하이힐을 신는 거지. 그는 고개를 들었고 바로 눈이 마주쳤다. 크응. 눈물과 콧물을 한번에 들이키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이와이즈미는 지금이야 말로 도망칠 때라고 생각했지만 움직이는 것은 우시지마가 더 빨랐다. 그는 부드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벌게져있는 얼굴을 커다란 손으로 슥슥 문지르고는 손을 내렸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았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이와이즈미의 어깨가 조금 무너졌다. 그의 손은, 정말이지, 따뜻했다. 그는 밖이 추웠다는 말도 안되는 변명을 하며 코를 훌쩍였고 우시지마는 그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여름이라고 해도 가디건을 꼭 챙기고 다니라고 당부하며 그의 뺨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함께 저녁을 먹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들뜬 마음에 이미 그동안에 메일로 전하고 손편지로 적어보낸 이야기들까지 모조리 끌어모아 떠들었고 우시지마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젓가락으로 맛있는 반찬을 집어 그의 숟가락이나 밥 위로 얹어주기도 했고 입술 아래쪽에 아슬하게 매달려있는 밥풀을 살짝 떼어보기도 했다.  맛있는 식사를 하고 달콤한 디저트를 챙겨먹은 다음, 함께 텔레비전 앞에서 끌어안은 채로 한참을 있었다.


"그, …씻고 올게."

"그래."


 엉거주춤 일어나며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우시지마는 욕실 문이 닫히고,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에 잠깐 들어섰다 방으로 들어가는 그의 손에는 하이힐이 흔들렸다.


  이와이즈미는 정수리로 쏟아지는 뜨뜻한 물을 맞으며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평소보다도 시간을 배로 들여서 꼼꼼하게 씻은 그는 멍하니 가운을 걸치다가 그의 비행시간을 떠올리며 끈을 단단하게 묶었다. 푹 자자고 말해야지. 화를 내버린 건 미안하다고 해야지. 그렇지만 남성용 구두나 기껏해야 운동화 정도만 늘어놓는 현관 앞에 하이힐이 대뜸 놓여있으면 별의별 생각이 들 수밖에 없지 않을까. …오랜만이었는데, 얼굴 보는 거. 겨울에 머리가 빠지도록 일을 해서 출장길에 가까스로 올랐지만 그는 시즌이었기 때문에 오래 뭉개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만 그 좁은 화장실에서 키스를 하다가…. 이와이즈미는 그의 입술을 떠올렸다. 자신을 끌어안는 단단한 팔과 몸이, 하지메, 하고 속삭이는 목소리와 자신을 곧게 쳐다보는, 단단한 눈동자까지─ 아……. 그의 샤워는 좀 더 이어질 것이다.


 오랜 샤워를 마치고 부드러운 수건으로 머리와 얼굴의 물기를 꾹꾹 눌러 닦으며 침실에 들어오던 이와이즈미는 수건을 내리자마자 보인 광경에 입을 벌렸다가 합, 하고 다물었다. 침대에 다리를 꼬고 앉아 수건으로 짧은 머리칼을 털고 있는 우시지마의 발끝에는 하이힐이 신겨져 있었다. 느릿하게 위아래로 흔들리는 빨간색 밑창이 혀처럼 그의 눈을 희롱했다. 그는 입안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훈련을 할 때나 경기를 할 때는 언제나 운동화, 배구화를, 공적인 자리나 데이트에서는 매끄럽게 빠진 구두를 신고 있던 발이 하이힐을 신고 있는 것은 생경한 광경이었다. 그 위로 단단한 발목과 튼튼한 종아리, 갈라진 허벅지가 이어지고 가운이 벌어졌지만 아슬하게 속옷을 가리고 있었다. 문제라면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는 것일까. 저 하이힐을 신고 찍은 화보는 분명 불티나게 팔릴 것이고, 어쩌면 섹시한 남자 순위에서 오이카와를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소꿉친구였기에 이와이즈미는 섹시한 남자 순위에 매번 오르는 것을 보며 긴가민가 했지만 매체에서 보여주는 모습이라면, 뭐, 이해가 되긴 했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이와이즈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유혹하는 남자의 얼굴은 첨예했다. 우시지마는 입을 열었다.


"하지메."


  고작 이름을 부른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 목소리가 이성줄 끄트머리에 불을 붙인 것만 같았다. 불은 빠르게 이성을 갉아먹으며 점점 더 크게 타올랐고, 이와이즈미는 그에게 한 발자국씩 다가갔다, 귓가에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그와 조금 떨어진 침대 끄트머리에 아슬하게 엉덩이를 붙였다, 무릎에 얹은 손을, 손가락 다섯 개를 천천히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이 움직였고, 선이 굵은 단단한 얼굴이 웃었다, 눈까지 휘어가며, 아주 재밌다는 듯이. 단단한 턱선이 부드럽게 아래로 향했고, 굳은살이 박힌 손가락이 그를 고스란히 감쌌다. 우시지마는 턱을 괴고 그를 바라봤다.


"잡아 먹기는 할 거지만, 가까이 와줘."


  이와이즈미는 푸핫, 소리내어 웃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단단히 묶은 허리끈이 쓸모를 잃었고 두 인영이 침대로 무너졌다. 턱을 장난스럽게 깨무는 입술과 치아에 킬킬 웃으며 팔을 들어 목덜미에, 어깨에 단단히 두른 그는 발을 대충 휘둘러 하이힐을 건드렸다.


"잘 어울려."

"그런가?"

"그렇지만, 여기서는 필요 없잖아."

"…그렇지."


  침대 바깥으로 하이힐이 한 짝씩, 아무렇게나 내던져졌다. 주문 제작된 하이힐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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